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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06 시리아 내전의 역사 본문

선교실/열방 기도운동

Day 06 시리아 내전의 역사

광주지부 2014. 7. 3. 06:49
Day 06 2014년 7월 3일 목요일 / 중동
- 2011년부터 현재까지 내전중인 시리아

기도를 할 때는 그 뿌리를 이해하고 근본을 다룰 필요가 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시리아 관한 것이지만, 모든 무슬림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이다. 4세기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덕분에 시리아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한 위상은 7세기 무렵 이슬람에 정복되어 오스만 제국의 일부이자 무슬림으로 남게 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지역의 갈등은 지속되어 왔고, 이 갈등이 시아파 무슬림과 수니파 무슬림 간의 분열 속에 반영되어 왔다(본 주제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임).
1차 세계 대전 당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시리아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는 데 힘썼다. 당시 프랑스가 개입하게 되면서 프랑스가 시리아를 나누어 수니파 무슬림을 다스리는 권한을 소수 종족인 알라위트(Alawites)에 넘겨주었다. 이후 1946년에 시리아가 독립하면서 알라위트 무슬림인 아사드(사자라는 의미)가 점차 힘을 얻었다. 그리고 1970년에 아사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강압적인 정치 국가를 만들었다. 수니파 무슬림(무슬림 형제단)은 이때 아사드를 암살하기로 맹세했다.
이후 30년의 통치 기간 동안 아사드와 알라위트에 대한 수니파 무슬림의 증오는 점차 커졌는데, 이는 오늘날 시리아 내전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스라엘을 무척 싫어했던 아사드는 1973년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에 패하긴 했지만, 아사드는 그 전쟁이 이슬람의 자부심을 더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리아는 레바논을 빼앗겼으나, 그 대신 아사드는 더 많은 힘과 동료를 얻었고, 특히 러시아와 이란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아사드는 2000년에 사망했다. 그해, 그 아들인 바사르 알-아사드는 수니파 부인을 맞이했다. 젊은 대통령을 통해 개혁이 일어나리라는 희망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국민을 착취했고, 가뭄과 더불어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국민은 더욱 빈곤해 갔다. 2010년까지 국민들은 강압적 정치아래 신음했다. 다수 수니파의 봉기가 소수인 알라위트를 위협하고 있다. 만일 알-아사드가 정권에서 물러날 경우 수니파의 대학살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수니파가 다수인 주변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이 지역 전체에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기도 제목
시리아에서 피신해 나온 한 선교사 가정은 다음과 같이 기도를 부탁했다.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성경이 시리아의 과거와 미래에 관해 말씀하시는 바(사 17:1)를 근거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깨닫도록
• 화해의 복음을 들어볼 기회조차 없는 무고한 그들을 위해 우리가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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